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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을 읽다|가난한 이의 촛불 한 자루에서 시작된 자비 - Naver Blog '김경철의 질문교육과 공부의 뿌리' ('26/08/15)

삼천사 2026-08-15 조회수 194

<<삼천사성운 대종사님의 자비로운 여정을 담은 감동적인 글을 전해드립니다>>


가난한 이의 촛불 한 자루에서 시작된 자비  Naver Blog "김경철의 질문교육과 공부의 뿌리" '26/08/15


천년 사찰에서 100년 뒤를 바라보는 스님


- 삼천사를 다시 세우고, 사람을 품어온 자안 성운 회주스님 이야기 -


바로가기 : https://blog.naver.com/baekdoosan07/224378975288



삼천사를 처음 찾은 뒤 제 마음속에는 여러 궁금증이 남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절은 누가 다시 일으켰을까?’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은 어떻게 보물로 지정되고 지켜질 수 있었을까?’ 

‘은평에서 익숙하게 들어온 인덕원은 삼천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운 회주스님은 왜 사찰 중창을 넘어 사회복지와 장학사업에 평생을 바쳤을까?’

궁금증은 질문이 되었고, 질문은 다시 한번 삼천사로 향하게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성운 회주스님께서 귀한 시간을 내주셨고, 은평구청장님과 함께 직접 스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짧은 만남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야기는 삼천사의 과거에서 은평의 가난했던 시절로, 다시 AI와 100년 뒤 삼천사의 미래로 이어졌습니다.

그날 저는 한 사찰의 역사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평생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는지를 들었습니다.


🌿 한 스님이 삼천사에 들어오다



삼천사는 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대사가 개산했다는 전승을 간직한 천년고찰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승려가 수도할 만큼 번창했고, ‘삼천사’라는 이름도 약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옛 삼천사는 크게 쇠락했습니다.


성운 스님이 처음 삼천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단정한 전각과 아름다운 정원이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사찰로 들어오는 길도 불편했고, 전기도 안들어 오고 전각도 한칸만 있었고, 주변 지역의 삶 역시 몹시 가난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선 진관동과 은평뉴타운 일대에는 당시 무허가 판자촌과 기자촌, 상이군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주민이 많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아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운 스님은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삼천사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 촛불 한 자루와 쌀 한 줌의 불공




당시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은 빈손으로 절을 찾기 미안해했습니다. 

누군가는 촛불 한 자루를 들고 왔습니다. 누군가는 쌀을 조금 가져왔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이 농사지은 고구마나 감자 몇 개를 품에 안고 왔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부처님께 올릴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성운 스님은 공양물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촛불 한 자루와 쌀 한 줌에도 정성이 담겨 있다며 주민들을 위해 불공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불공이 끝나면 그들이 가져온 쌀과 고구마, 감자를 다시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인 음식은 사찰 창고에 쌓이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더 어렵게 사는 이웃과 끼니를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져온 작은 정성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촛불 한 자루는 법당을 밝혔고, 쌀 한 줌은 가난한 이웃의 밥이 되었습니다."


성운 스님의 사회복지는 큰 시설이나 넉넉한 재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가져온 감자 한 알을 더 어려운 사람과 나누는 일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작은 나눔이 훗날 인덕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사업으로 성장한 최초의 씨앗이었습니다.


👦 도둑질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주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물건이나 음식을 훔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운 스님은 그 아이들을 단순한 범죄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왜 이 아이가 도둑질을 해야 했을까?’ 

잘못을 꾸짖기에 앞서 아이가 처한 가난과 배고픔을 먼저 살폈습니다. 

경찰서에 아이를 데려올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있어도 보증을 서줄 형편이 되지 못하면 스님이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대신해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그 일은 법적 절차를 대신해 주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타이르고, 아이가 돌아갈 곳과 살아갈 방법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아이의 잘못을 눈감아준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잘못 때문에 삶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준 것입니다.

성운 스님에게 자비는 잘못을 무조건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이었습니다.


🚪 서대문교도소로 이어진 인연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생계형 도둑질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아이 가운데 일부는 성장한 뒤 또다시 절도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운 스님은 그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자기 책임이다’라며 인연을 끊지 않았습니다. 

교도소를 찾아가 면회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붙잡아주었습니다.

경찰서에서 보증을 서주던 일이 교도소 면회로 이어졌고, 그것이 성운 스님의 교정교화 활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한 번 손을 잡아주는 것도 자비지만, 다시 넘어졌을 때 또 찾아가 손을 내미는 것도 자비였습니다."


스님에게 교도소 담장은 사람을 포기해야 할 경계가 아니었습니다. 담장 안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 교정교화에서 군교화로




성운 스님의 자비 실천은 교정시설을 넘어 군 장병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에게 정서적인 위로와 삶의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정교화가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의 재출발을 돕는 일이었다면, 군교화는 젊은 장병들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며 국민을 위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운 스님의 실천은 점차 넓어졌습니다.


촛불과 공양미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는 일


경찰서에 붙잡힌 아이의 보증인이 되어주는 일


수감된 청년을 찾아가 다시 일어서도록 돕는 일


군 장병의 마음을 돌보는 일


노인·아동·지역주민을 위한 복지사업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배움을 돕는 장학사업


작은 나눔에서 출발한 자비는 개인을 넘어 지역사회로, 다시 국민을 위한 사회복지로 확장되었습니다.


🏡 기자촌과 상이군인 마을에서 시작된 복지




오늘날의 은평뉴타운만 바라보면 과거 이 지역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운 스님이 처음 삼천사에 왔을 당시 주변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있었고, 기자촌과 상이군인 집성촌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사찰은 단지 불공을 드리는 종교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플 때 쌀과 감자를 나누어주는 곳이었고, 아이가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부모 대신 찾아와 주는 곳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정을 털어놓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성운 스님의 사회복지는 책에서 배운 이론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삼천사 주변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을 매일 만나고, 그들의 배고픔과 눈물을 직접 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실천이 점차 체계를 갖추면서 사회복지법인 인덕원과 삼천사 미타원, 성운장학재단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명함에 적힌 여러 직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촛불 한 자루와 감자 몇 알을 받아 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던 마음."


 성운 회주스님의 모든 복지사업은 결국 그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 자비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성운 스님에게 불교의 자비는 법당 안에서만 설명되는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나누고, 갈 곳 없는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되어주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다시 살아갈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자비였습니다.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를 먼저 판단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운 스님의 사회복지는 단순한 구호사업과도 달랐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이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삼천사의 중창과 사회복지도 서로 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절을 다시 세우면서 동시에 사람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 ‘고려의 미소’를 지켜낸 시간




삼천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온화한 표정은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흔히 ‘고려의 미소’라고 불리는 이 마애불은 오늘날 삼천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성운 스님은 쇠락한 삼천사를 중창하는 한편, 마애여래입상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전각을 다시 세우는 일과 문화재를 지키는 일,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운 스님의 삶에서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세워야 할 것을 세우며,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 “공부에는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면담 중 특히 놀라웠던 것은 성운 회주스님께서 교육과 ‘공부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AI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하고 질문한 뒤 답을 검증하고 자기 언어로 표현하도록 돕는 QTE AI 질문교육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스님은 QTE AI교육이 공부의 뿌리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힘이 없다면 지식은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공부의 뿌리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질문교육이 맞닿는 순간이었습니다.

삼천사의 뿌리를 다시 세운 스님께서 아이들의 공부에도 뿌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깊게 다가왔습니다.


🤖 AI를 ‘기계부처님’이라 부른 스님




성운 회주스님은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해박했습니다.

AI를 낯설거나 두려운 기술로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AI와 AR·VR을 활용해 불교의 가르침과 삼천사의 역사·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습니다.

AI가 경전과 법문을 학습해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고, 시간과 장소를 넘어 지혜를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AI를 ‘기계부처님’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AI를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기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인 비유였습니다.

천년고찰의 원로 스님이 AI와 AR·VR을 이야기하고, AI를 ‘기계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AI를 ‘기계부처님’이라고 표현하신 스님의 말씀은 짧았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말에는 인공지능이 불교의 지혜와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새로운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이번에는 충분히 여쭙지 못했지만, 언젠가 다시 스님을 뵙고 ‘기계부처님’에 관한 생각을 자세히 들을 기회가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그 이야기는 어쩌면 40년, 50년, 100년 뒤 삼천사의 모습을 그리는 또 하나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누구나 찾아와 쉬는 삼천사




성운 회주스님께서 바라는 삼천사는 불교 신자들만의 사찰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살아온 길이 달라도, 마음이 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삼천사를 찾아와 편안히 쉬기를 바라셨습니다.

북한산 숲길을 걷고,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마애불의 온화한 미소 앞에서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곳. 아이와 부모, 청년과 어르신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오는 곳.


성운 스님이 꿈꾸는 삼천사는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열린 힐링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뜻은 스님이 처음 진관동의 가난한 주민들을 품었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쌀과 고구마를 나누어 몸의 허기를 채워주었다면, 앞으로의 삼천사는 지친 사람들의 마음까지 쉬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삼천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와서 쉬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 절을 세우며 사람을 일으킨 큰스님




성운 회주스님의 이야기를 한 가지 이름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스님은 쇠락했던 삼천사를 다시 세운 중창주이며, 마애여래입상을 지켜낸 문화재 수호자입니다. 


가난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주었고, 수감자를 찾아가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으며, 군 장병과 노인, 아동과 학생을 품어온 사회복지 실천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공부의 뿌리를 이야기하고 AI를 ‘기계부처님’이라고 부르며 100년 뒤의 삼천사를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인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심은 하나였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성운 스님은 전각만 다시 세운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나누고, 넘어진 아이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며, 누구나 찾아와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을 세웠습니다.



✍️ 은평을 읽다

처음에는 삼천사의 표석과 마애불, 적멸보궁이 궁금해 시작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운 회주스님을 직접 뵙고 나니 삼천사의 진짜 역사는 전각과 불탑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촛불 한 자루를 들고 온 가난한 주민, 배가 고파 잘못을 저지른 아이, 그 아이를 찾아 경찰서와 교도소로 향했던 스님의 발걸음 속에도 삼천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인덕원과 미타원, 성운장학재단으로 이어진 사회복지의 시작도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쌀 한 줌과 고구마 몇 알을 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었던 작은 자비였습니다.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자리에서 스님은 오랜 시간 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덕분에 삼천사에 관해 품고 있던 여러 질문의 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만남으로 모두 담기에는 성운 회주스님의 삶과 이야기가 너무 깊고 넓었습니다. 오늘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고자 합니다.


글/ 김경철